서재필 - 한국 민주적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힘쓴 한국계 미국인 1호
- 먼나라 이야기
- 2014. 5. 15. 03:49
국사시간에 구한말 한국민 계몽을 위한 독립신문 발간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서재필(생몰: 1864년 1월 7일~1951년 1월 5일)에 대해서 배우셨을 겁니다. 그런데 서재필은 한국 역사에서도 다뤄지는 주요인물이지만 미국에서도 또 한 획을 그으신 분이세요. 1885년 미국으로 온 서재필은 1890년 6월 10일 미국으로 귀화해 한국계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한국계 미국인 1호가 되시는 거지요. 서재필의 미국명은 영어식으로 발음을 차용해 변형한 Philip Jaisohn이시구요. 한국 역사 속에서 기억하는 서재필은 우선 김옥균, 홍영식, 윤치효, 박영효등과 함께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이죠. 갑신정변은 '3일 천하'라는 별명답게 실패했고 이후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서재필
자료를 읽다 보니까 갑신정변 실패로 서재필의 남겨진 가족들은 자결 및 연좌제 등에 걸려 큰 화를 당했더군요. 서재필이 갑신정변 주동자라 해서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혀 관기로 보내지게 된 그의 처 광산 김씨도 자결했습니다. 당시 2살난 그의 아들도 굶어 죽었다고 하더군요. 역적의 자식이라고 일부러 굶겨 죽였다고도 하고, 너무 굶주렸던 아기가 독약으로 자살한 엄마인 광산 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젖으로 독약이 몸에 퍼져 죽었다고도 하구요. 당시 참 잔인했죠. 동생 서재창은 군대에 있었는데 처형되었고, 시집간 큰누나는 출가했다 해서 이 화를 모면했습니다. 하지만 출가 전 여동생 서기석은 이 혼란에서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남아 함경도로 도망갔고 거기서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결혼해 자녀를 낳고 살았다고 합니다. 17세 막내 남동생 서재우만 나이가 어리다 해서 이 모든 참화에서 겨우 죽음을 모면해 살아남았습니다. 연좌제는 서재필의 외가에도 미쳐서 가산이 탕진되고 이산되는 참변을 겪었네요.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 역시 투옥 및 심한 고문을 당했구요. 이 끔직한 소식을 해외에서 듣고 서재필이 느꼈을 감정은.... 지독한 분노와 슬픔으로 끔찍했겠죠.
1885년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서재필은 정말 고생 많이 하셨더군요. 지금부터 약 130년 전입니다. 130 여 년 전 미전국에 한국인(당시 조선인)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겁니다. 현재도 미국에 아무연고 없이 이주하면 거기에 언어까지 통하지 않으면 정말 어렵지요. 고된 미국생활을 하고 있던 서재필은 운좋게 후원자를 만나 사립 고등학교와 워싱턴 컬럼비안 대학(현재 조지 워싱턴 대학)을 의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아주 잘하셨어요.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 한국계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컬럼비안 대학을 다니면서 1890년에 귀화해 미국인이 되셨구요. 1894년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전 대통령의 사촌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 창설자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해 딸 둘을 낳았습니다.
미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재임: 1857~1861)
서재필의 처당숙되십니다.
참고로 뷰캐넌 다음에 16대 대통령이 되시는 분이 그 유명한 링컨 대통령입니다.
1894년 조선에서는 김홍집 등에 의해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혁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집니다.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박영효를 만나 권유를 받아들여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1895년 12월 외국인인 미국인으로 조선에 귀환하시죠. 귀국한 서재필은 외무부 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 자리를 제수받았지만, 서재필이 미국인이므로 수락할 수 없다고 밝히고 형식적으로 대한제국 정부 고문겸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발간을 합의해 온건 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정부의 재정지원, 일부 지식인들의 자발적 성금으로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이였던 "독립신문"이 탄생하게 됩니다.
1897년 10월에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합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 토론에서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기습토론으로 여론을 공론화 시켰죠. 윤치호와 서재필은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또한 재산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닙니다. 당시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했구요. 하지만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 기습토론 이후 노비해방 풍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갑오개혁(1894~1895)을 통해 노비제가 철폐되었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1897년 11월 독립협회 기습토론에서 노비해방을 다룬 것 보니까 노비제가 철폐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더군요. 그래서 더 찾아 봤는데 갑오개혁에서는 노비제를 철폐한 것이 아니고 여러 반발때문이였는지 노비매매 금지로 수정해서 정책을 완화했다고 하더군요. 갑오개혁을 통해 기존 양반 신분제를 철폐하는 시도가 시작되었지만 이런 게 무 자르듯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지라 노비제 포함 신분차별은 그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언제 노비제가 확실히 철폐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갑오개혁이 2014년 올해로 딱 120년 전에 있었으니까 그 이후 언제쯤이 되겠죠.
2008년 5월 워싱턴 DC 주미 한국 대사관 영사관 앞에 세워진 서재필 동상
이 이후 서재필에 대한 내용을 제가 다 정리해 올리는 것이 시간상 어려운 관계로 관심있으신 분들은 독립운동 포함 추후의 일들 및 이분에 관한 여러 관점에 대해서 위키피디아 및 여러 관련 자료를 찾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아래에 연결해 두었습니다.
* 한국어 위키피디아: 서재필
* 영어 위키피디아: Seo Jaipil
그런데 서재필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몇가지 찾은 이분의 말씀을 아래에 몇가지만 발췌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참고로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1951년 1월 5일까지 생존했던 분입니다.
만일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이 많이 있을 터이요. 우리가 이 신문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게 아닌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여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 독립신문 창간호 사설(1896년)
우리가 독립 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잇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의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우히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것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설명할 터이옴.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정을 퍼일 터이요, 사사로운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
그러한 즉 이 신문은 꼭 조선만 위함을 가히 알 터이요, 이 신문을 인연하여 내외,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조선 일을 서로 알 터이옴.
— 독립신문 창간사,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귀국하자 서씨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를 몹시 싫어하였다. 서재필은 문중에서 서재필이 아들이 없음을 염려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계획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살아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거절하였다. 서재필은 또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어설픈 온정주의와 가족주의가 사회를 폐쇄화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죽고 못살듯이 가족을 찾더라도 큰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터지면 자기 혼자 살려고 도망칠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서재필은 한국인의 가족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 훗날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라고 칭송했다.
해방 후 미군정청 최고의정관으로 일하다 사직하고 1948년 9월 11일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재필은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또한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시도지사 선거로 선출된 입법의원과 시도지사를 상관처럼 깍듯이 대하는 시민들에게 선거로 뽑은 것은 국민의 대리인이지 윗 사람이 아닌데, 윗 사람처럼 깍듯이 존대한다며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는 이념 대립을 딛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1948년 9월 11일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을 대동하고 미군정을 따라 인천항을 떠났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는 날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배에 올랐다. 그는 아직도 국민들이 조선시대에 살고 있으며, 선거는 인민의 대리인을 선출하는 제도인데 마치 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이다.
— 승선 직전에 한 한마디 (1948년 9월 11일)
승선한 이후(1948년)에도 창밖으로 인천 제물포 부둣가를 한참 쳐다봤다 한다. 당시 이 선박에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미국에 유학가는, 건국후 최초의 미국 유학생 32명이 동승하였다. 배편으로 미국에 갔는데 멀미 한번 하지 않았다 한다. 배 안에서 음력 8월 중순이 되자 그는 음력 8월 15일 밤 서재필은 선장에게 한국 음식을 특별히 마련하게 하고 갑판 위에서 남녀 학생들과 파티를 열었다. 미국에 가거든 쓸데없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군인들이 쓰는 비속어를 쓰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 같은 것들을 하지 말고, 독립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살려 서투르더라도 점잖고 올바른 영어를 쓰도록 하시오.
그는 늘 '오직 충실과 근면만이 인생의 올바른 생활태도'라고 항상 이야기했다. 사람을 상대할 때도 편견이나 차별대우를 하지 않고 똑같이 객관적으로 대하였다. 한편 그는 민족주의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맹목적인 민족주의는 인간을 비이성적이고 불의(不義)하게 만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민족과 정의,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서재필께서 150 여년 전에 태어나신 분이 위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한국사회에 이런 모습이 적용이 되는 군요. 서재필이 하셨던 말들을 쭉 읽으니 막막한 마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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